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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박스의 유래와 역사

일상/생활정보 2017. 4. 26.

컨테이너는 볼품 없는 직육면체의 거대한 박스입니다. 하지만 수출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의 하나로, 만약 컨테이너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는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입니다. 세계 물류 물동량의 90%를 이 컨테이너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컨테이너 선박이 없던 시절에는 세계 각국이 이렇게 많은 물건을 서로 사로 팔면서 무역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햇다고 합니다. 컨테이너가 나왔기 때문에 엄청난 무역이 가능해졌고, 수출을 많이 하는 우리 나라도 컨테이너 덕을 톡톡히 본 셈이죠.

컨테이너의 등장

컨테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가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였습니다.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해서 마차 뒤에 연결하던 큰 나무박스를 컨테이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영국과 유럽 각국에 철도가 놓이고, 철도에서도 사용이 됩니다. 당시 컨테이너의 재질은 나무였고 위에 뚜껑이 없는 개방된 형태였다고 합니다.

현재와 같은 직육면체의 컨테이너는 20세기 들어서 보급됐습니다. 특히 세계 2차대전 때 컨테이너 사용이 획기적으로 늘어납니다. 당시 미군이 재사용이 가능한 컨테이너를 만들어서 운송에 효율성을 높였구요. 6.25 한국전쟁 시기에는 철재 컨테이너로 운송하면서 진화를 하게 됩니다.

컨테이너의 진화

하지만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컨테이너 사용은 상업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배가 부두에 도착해서 화물을 내려 놓으면 항만 노동자들이 부두와 도로 사이에 배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짐을 내리는 방식으로, 화물 이동이 사람의 노동력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화물 운송 비용도 비쌌고 시간도 오래 걸렸는데, 1954년만 해도 5천톤 가량의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작업에만 10일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이 시간은 당시 뉴욕에서 대서양을 항해하는 시간과 맞먹는 긴 시간입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로 물건을 수출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1950년 4월 26일 말콤 맥린이라는 사람이 2차대선에서 사용된 유조선을 개조해서 Ideal X 호라는 컨테이너 선박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선박에 35피트(10미터) 규모의 컨테이너 58대를 싣고 뉴저지에서 텍사스 휴스턴까지 5일만에 옮기는데 성공합니다. 세계적인 경영석학인 피터 드러커는 컨테이너를 두고 세계 경제사를 바꾼 대혁신적 발명품이라고 칭했고, 포브스는 말콤 맥린을 세계 경제사를 움직인 인물로 추켜세웠습니다.

컨테이너의 활성화

이후 1967년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미군에 필요한 막대한 군용 물자를 전쟁터로 수송하는데 컨테이너 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미국 동부에서만 사용되던 컨테이너가 서부에서도 사용되고 전쟁터에도 컨테이너가 전달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베트남에서 컨테이너 적체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컨테이너를 돌렸습니다. 당시 일본은 기술집약적인 산업에서 미국을 앞선 상황이었는데 이 컨테이너를 이용해 미국과 전 세계로 각종 제품을 이동시켰고 이를 통해 컨테이너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70대에 들어오게 됐고 얼마 전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진 한진해운이 이때 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 제조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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